세종 29년 8월 2일, 조정에 상소 하나가 올라온다. 조유례에게 내려진 벼슬을 철회하라는 대사헌의 상소인데, 그 이유를 옮기자면 이렇다. 지금 조유례의 할머니 김씨의 행실이 음란하고 더러운 것은 분명합니다. 말하기조차 추한 일을 어찌 다시 입에 올리겠습니까? 김씨는 자녀안(姿女案) 첫머리에 실려 있어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녀의 내외 자손들이 뻔뻔한 얼굴로 염치없이 벼슬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1 여기서 자녀안(恣女案)이란, 음란하고 방종한 여자의 이름과 행적을 기록한 문서다. 그러니까 이 상소는 조유례의 할머니 김씨가 조선의 공식적인 음란한 여자 1호이고, 그녀의 후손은...
원수의 노비가 된 여인들 조선의 7대왕 세조 2년 6월 8일, 한양 군기감 앞 저잣거리는 참혹했다. 성삼문 등 12명의 팔다리는 수레에 차례로 묶였고, 사지는 피를 뿜으며 찢겨 나갔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는 이미 죽은 3명의 머리와 함께 3일간 저잣거리에 내걸렸다. 참혹한 피의 향연은 이후 20여 일간이나 계속됐다. 그렇게 능지처참을 당한 죄수만 48명, 목이 졸려 죽은 역적의 자손은 백여 명을 넘어섰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맞서 단종을 복위시키려했던 ‘단종복위사건’은 이렇게 끝이 났다. 여기까지가 대역죄인이 된 단종의 충신들, 이른바 ‘사육신’들의 최후다. 이렇게 남자들의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실록에는 수백 개...
그 남편의 그 아내 소헌왕후 심씨 소헌왕후는 몸이 굳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 심온이 길 위에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다. 억울한 누명을 쓴 것도 원통한데 소명을 할 기회마저 없이 한양에 당도하기도 전에 역적이 되어 죽임을 당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걱정되었으나 그들에게 연통을 전할 수도 받을 수도 없었다. 소헌왕후는 궁 안에 갇혀 손발이 잘리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시아버지 태종은 남편에게 왕위를 넘기자마자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을 사은사로 삼았다. 왕의 신임을 받는 자만이 왕명을 받들고 명나라에 가는 사은사가 될 수 있다. 태종은 심온이 길을 떠나기 바로 전 그를 영의정으로 높여 버린다. 왕의 장인...
어린 왕을 지킨 충신 혜빈 양씨 조선의 왕 27명 중에서 가장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왕을 꼽자면 첫 번째가 단종일 거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작은아버지(세조, 세종의 2남)한테 왕위를 빼앗기고 죽임까지 당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태어난 다음날 엄마를 잃었다는 것이다. 왕실에서 엄마의 부재는 모진 바람 속에 맨 몸으로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로운 상황임에 틀림없다. 왕위라는 게 혼자의 힘으로 오르고, 유지되는 게 아니니까. 외가와 처가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지원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종은 시작부터 결핍된 환경이었고 마지막 또한 애달프다. 강원도 영월로 유배 돼 죽임을...
불쌍해서 어째! 언니가 순장된 것도 모자라 이제 또 동생까지 죽으러 가다니…. 산송장이 따로 없구나. 산송장이 따로 없어…! *1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할 길, 한씨는 그 길을 나섰다. 한씨는 명나라 선덕제에게 바쳐진 공녀다. 공녀 또는 진헌녀라 불리는 이들은 진상하는 물품처럼 명나라 황실에 바쳐진 여성들을 말한다. 명나라 황제 영락제와 선덕제의 개인적 요구에 의해 보내진 조선의 공녀는 총 114명, 태종 8년에서 세종 15년까지 26년간 7차례에 걸쳐 보내졌다. 이들 114명 중 황제 또는 황족과의 결혼을 위한 공녀는 16명이고, 나머지는 황제의 음식과 유희를 위한 집찬녀와 가무녀,...
왕의 아내, 살해당하다 "만약 중국 조정에서 폐비 윤씨의 일을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폐비되어 친정에 있다고 답하라. 만약 끝까지 캐 묻거든, 근심에 시달리고 파리해져서 죽었다고 대답하라." - 성종실록 150권, 성종 14년 1월 8일 위 기사는 성종14년 폐비 윤씨가 죽은 지 약 6개월 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한명회와 성종의 대화내용이다. 질문의 뉘앙스에서 느낄 수 있다. 명나라에서는 폐비 윤씨가 죽은 것을 아직 모르는 상황임을. 그런데 좀 이상하다. 질투가 심해 쫓겨난 폐비 윤씨는 사약을 받아 죽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폐비 윤씨가 근심과 걱정 속에 스스로 죽어갔다니 말이다. 맞다. 폐비...
자유로운 신체, 어을우동 아무도 없는 옥사 안, 올가미에 묶인 목이 마지막 기운을 쏟아내며 바르르 떨었다. 그 마지막 몸짓에 줄이 한 번 더 당겨지자, 숨통이 끊겼는지 매달린 몸이 축 늘어졌다. 초겨울 사나운 바람이 차디찬 옥사 안을 휘돌아 죽은 자의 마지막 숨결마저 훑어갔다. 죽음을 확인한 옥졸이 살 속에 파고든 올가미를 걷어내자, 목이 잘리기라도 했듯 옆으로 휙 꺾였다. 어을우동의 마지막을 그려봤다. 성종 11년 여름에서 초겨울까지,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어을우동의 성 스캔들은 세상에 드러난 지 4개월 만에 끝이 났다. 어을우동의 죽음으로 *1 . 사건이 드러나고 형이 집행되기까지 겨우 4개월! 3심까지 올라온 죄안...
가장 보통의 조선 여인 첫 번째 세자빈을 내친 후, 고르고 골라 뽑은 두 번째 세자빈 봉씨. 세종은 이 아름답고 해맑은 세자빈에게 ‘아내로서 순종하는 도리’ *1 를 기대했다. 그러나 봉씨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고,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조선 전기 보통의 여염집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종과 문종은 이런 봉씨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당시 세종은 온 백성들을 유교적 윤리로 교화시키려는 의지에 불타고 있었다. 조선 최초의 윤리책인 <삼강행실도>를 편찬한 것도 이 무렵이다. 세종은 그림을 그려서라도 백성들에게 유교적 도리를 가르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자신의 며느리가, 그것도 장차 국모가 될 여인이, 자신의...
노비를 사랑한 양녕대군의 딸, 음란 여성으로 낙인찍히다 내 이름은 이구지. 양녕대군의 딸. 아무도 무시하지 못할 신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음란한 여자로 손가락질당하면서 조선 왕실의 수치가 되었고, 죽임까지 당했다. 왕실 족보에서 이름이 빠지고, 음란하고 방탕한 여자를 기록하는 자녀안(恣女案)에 이름이 올랐다. 내가 음란한 여자라고? 나는 조선 사회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든 유감동이나 어을우동처럼 숱한 남자를 만나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 남편이 사망한 후 노비를 사랑한 죄밖에 없다. 물론 신분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왕의 손녀가 노비와 간통했다고?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끊...
남편을 왕으로 만든 대장부 회안대군과의 싸움은 어찌 돼가고 있는지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은 커졌지만 이 또한 진득하니 내리눌렀다. 순간 들린 말울음 소리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이런! 대군께서 돌아오신 줄 알았는데 바람소리였나 보다. 우리 부부는 바라고 또 바랐다. 오늘과 같은 싸움이 일지 않기를. 하지만 오늘은 오고야 말았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고, 앉아서 죽음을 맞을 수는 없었다. 이른 새벽 남편은 형제의 목에 칼을 겨누려 일어서야 했고, 난 또 다시 남편에게 갑옷을 입혀야 했다. 주인 없는 말 한 필이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결국… 이렇게 끝났구나! 남편의 패배가 확실했다. 허면...
조선의 남편들 근비의 목을 자르다! 한 사건에 세 번의 심판을 받을 수 있는 3심 제도는 현대에만 있는 제도가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사형수는 신분에 관계없이 재판을 세 번 *1 받을 수 있었다. 사람 목숨이 걸렸으니 재판에 신중을 기하자는 것이다. 근비에 대한 판결 또한 이 과정을 거쳐 나왔다. 근비는 차경남, 박종손과 간통했다. 그리고 간통남 박종손이 차경남을 죽일 걸 알면서도 막지 않았다. 결국 근비는 몸을 6토막으로 잘라 죽이는 능지처사를 선고 받지만 임금의 선처로 목만 잘려 죽는다 *2 . 헌데 얼핏 봐선 근비의 죄가 죽을 죄인지 고개가 갸웃해진다. 더구나 벌이 능지처사급이라니....
성군(聖君) 정희왕후 윤씨 성종 14년 3월 30일,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승하했다. 멀리 온양에서 날아온 소식이었다. 13살 때 할머니 손에 왕위에 올라 할머니 품에서 왕도를 익힌 성종, 그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난 2월 할머니께서 아픈 몸을 이끌고 온천으로 떠나실 때는 쾌유하실 거란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강변에서 무릎 꿇고 올린 인사가 마지막이 될 줄이야……. 예종이 죽고 혼란한 정국을 재빨리 수습했던 정희왕후, 조선 최초로 임금을 대신해 ‘청정 *1 ’을 하며 국정을 안정되게 이끌었던 대왕대비였다. 성종은 그런 할머니를 최고의 예우로 보내드리고 싶었다. 하여 그는 일체의 장례를 왕후가 아닌 대왕의 예에 따라 진행...